
그동안 제 블로그에서 웅장한 SF나 잔잔한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주로 들려드렸었는데 오늘은 제 블로그의 분위기를 살짝 바꾸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묵직한 인간애와 힐링을 담은 '실화 바탕 드라마' 한 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바로 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었던 영화, <그린 북(Green Book)>입니다.
사실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봤을 때는 그저 흔하디 흔한 두 남자의 유쾌한 우정 이야기인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 마음속에는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파도가 몰아쳤어요.
이 영화는 단순히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다정한 위로나 선물 같은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극 중 백인들의 이중적인 잣대 속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를 묵묵히 견뎌내는 돈 셜리 박사의 모습을 보는 내내, 제 마음 한구석에는 자꾸만 설명하기 힘든 불편한 감정과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내가 그 시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 방관자들과 다르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거든요.
보는 내내 가슴을 찌릿하게 만드는 불편함과 미안함이 남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몇 번을 돌려봐도 늘 새로운 부끄러움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향해 묵묵히 다정한 화해를 건넸던 돈 셜리 박사의 삶과, 제 내면을 깊게 두드렸던 이 솔직한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1960년대 미국, 너무나도 달랐던 두 남자의 위험한 만남
영화의 배경은 인종 차별이 아직 대놓고 당연시되던 1962년의 미국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그야말로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섞이기 힘든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인물들입니다.
한 명은 뉴욕 브롱크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인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입니다. 입담이 좋고 주먹 꽤나 쓰는 클럽 가드인데, 다소 거칠고 교양이 부족하지만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는 평범한 가장이죠. 심지어 집을 고치러 온 흑인 기술자가 쓴 컵을 슬쩍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은근한 인종적 편견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그의 고용주가 되는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 박사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흑인 클래식 피아니스트입니다. 3개의 박사 학위를 가졌고, 카네기 홀 위에 위치한 대저택에서 왕처럼 살아가며, 격식과 품위를 목숨처럼 아끼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돈 셜리 박사의 미국 남부 투어 콘서트'를 위해 한 차를 타게 됩니다. 돈 셜리는 차별이 가장 심한 남부 지역을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운전사 겸 보디가드로 토니를 고용하고, 두 남자는 8주간의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영화 제목 '그린 북'이 가진 씁쓸하고도 무거운 의미
영화를 보다 보면 토니가 양복 주머니에서 초록색 책 한 권을 꺼내 수시로 들여다보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그린 북(The Negro Motorist Green Book)'은 당시 실제로 존재했던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이 책의 정체는 '흑인 여행자들을 위한 안전 안내서'였습니다. 인종 차별이 공공연했던 당시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이 거절당하지 않고 숙박할 수 있는 여관, 식사할 수 있는 식당, 이용 가능한 주유소 목록을 적어둔 책이었죠. 흑인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가는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갇히던 야만의 시대였음을 보여주는 슬픈 증거물입니다.
돈 셜리 박사는 천재적인 피아노 연주로 백인 상류층의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는 귀한 몸이지만, 무대 밑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저 '그린 북'에 적힌 허름한 모텔만 이용해야 하는 흑인일 뿐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화려함과 무대 아래에서의 처참한 차별. 그 간극을 묵묵히 견뎌내는 돈 셜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도 참 먹먹하고 안타까웠습니다.

편견의 벽을 허문 다정한 화해, 그리고 '치킨'이 준 구원
이 영화가 뻔하지 않고 매력적인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서서히 물들어가는 과정을 아주 유쾌하고 섬세하게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차 안에서 두 사람이 '켄터키 프라이드치킨'을 나누어 먹는 신입니다. 평생 손에 기름을 묻히지 않고 나이프와 포크로만 음식을 먹어온 교양 있는 돈 셜리에게, 토니는 맨손으로 치킨을 뜯어보라며 막무가내로 치킨 한 조각을 건냅니다.
처음에는 품위를 지키려 완강히 거부하던 돈 셜리가 마지못해 치킨을 한 입 베어 물고, 그 맛에 눈을 뜨며 창밖으로 뼈를 툭 던지는 장면은 정말 몇 번을 돌려봐도 질리지 않는 이 영화의 백미입니다. 격식이라는 딱딱한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외롭게 살아가던 돈 셜리가, 토니의 날것 그대로의 다정함에 마음의 빗장을 열기 시작한 상징적인 순간이었으니까요.

반대로 토니는 돈 셜리의 도움을 받아 아내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됩니다. 맨날 "밥은 잘 먹었다, 보고 싶다" 같은 낙서 수준의 편지만 쓰던 토니였는데, 돈 셜리가 곁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아름다운 풍경과 같다"며 문학적인 문장들을 읊어주자 토니는 감탄하며 이를 받아 적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친구가 되어가는 모습은 보는 내내 가슴을 따뜻하게 정화해 줍니다.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다면..." 빗속의 절규
하지만 영화가 마냥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중반부, 폭우가 쏟아지는 도로 위에서 경찰에게 부당한 검문을 당한 후 돈 셜리가 참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절규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백인들은 내 음악을 들으며 교양 있는 척 감탄하지만, 무대 아래로 내려가면 난 그저 그들에게 깜둥이일 뿐이야. 하지만 난 내 동족(흑인)들의 삶에도 섞이지 못해. 내가 충분히 백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흑인답지도 않고, 충분히 남자답지도 않다면... 그럼 난 도대체 누구지?"
이 대사를 들을 때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돈 셜리는 세상을 향해 아름다운 음악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백인과 흑인이라는 거대한 장벽 사이에 끼어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극심한 외로움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죽음이나 차별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도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과 예술이 편근에 의해 파괴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상처받는 것을 더 안타까워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의 깊은 고독을 보면서 인간이 만든 편견의 벽이 한 개인의 영혼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인물들이 남긴 위대한 유산
영화의 결말 부근, 흑인이라는 이유로 고급 콘서트장의 식당 입장을 거부당하자 돈 셜리는 과감히 연주를 취소해 버립니다. 그리고 토니와 함께 흑인들이 모여 있는 작은 로컬 펍으로 향하죠. 그곳의 낡은 피아노에서 돈 셜리가 아주 자유롭고 신나게 재즈를 연주하고, 토니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가 주는 최고의 치유이자 화해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린 북>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에 그 울림이 훨씬 오래갑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나기 전 자막을 통해 두 실제 인물의 사진과 후일담이 나오는데요. 놀랍게도 두 사람은 이 남부 투어 이후 평생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다가, 2013년 단 몇 달의 간격을 두고 함께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상처 주는 세상을 향해 먼저 다정한 음악으로 손길을 내밀었던 돈 셜리 박사, 그리고 편견의 벽을 깨고 기꺼이 그의 든든한 보디가드이자 이웃이 되어준 토니.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다시금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이 영화 <그린 북>을 강력히 추천해 드립니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인생 영화를 만나시게 될 거예요.
여러분은 편견 없는 다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 누구에게 먼저 따뜻한 미소를 건네고 싶으신가요?
그 자그마한 마음이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