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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 백색 실명이 드러낸 인류의 민낯 집단 붕괴 속에서 다시 묻는 인간 본성의 양면

by 다이백 2026. 5. 6.

현실이라면 더 무서웠을 눈먼자들의도시 공개 포스터

 

 

솔직히 처음에 이 영화를 틀었을 때, 저는 그냥 흔한 재난 스릴러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눈이 멀면 무섭겠지, 그 정도의 막연한 공포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꺼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무서운 건 실명(失明)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눈이 멀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서로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 본질적인 소외가 진짜 공포였습니다.


실명 전염병이 촉발한 집단 붕괴의 과정 : 눈먼자들의 도시


영화는 한 남성이 운전 중 갑자기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며 실명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른바 백색 실명(White Blindness). 여기서 백색 실명이란 기존의 어둠이나 시야 흐림과 달리 세상이 하얀 빛으로 가득 차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는 설정으로, 영화 전반의 공포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일반적인 실명과 달리 어둠이 아닌 빛으로 가득 찬다는 설정이 오히려 더 기이하고 압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전염은 빠르게 퍼집니다. 정부는 감염자들을 격리 수용소(Quarantine Facility)에 집단 수용하기로 결정합니다. 격리 수용소란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감염자와 접촉자를 외부와 차단해 보호·관찰하는 시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수용소가 보호의 공간이 되는 것은 아주 짧은 초반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급이 끊기면서 내부 질서는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제가 특히 주목한 장면은 식량 배급이 끊기고 나서 한 병동이 총기를 앞세운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아노미(Social Anomie) 현상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사회적 아노미란 기존의 규범과 질서가 붕괴되어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기준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눈이 멀었다는 조건은 이 붕괴를 몇 배로 가속시켰을 뿐, 근본적인 원인은 이미 인간 내면에 잠재해 있었던 야만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재난 상황에서 인간의 집단 행동 변화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자원 부족과 불안이 겹칠 때 이타적 행동보다 자기 보호 본능이 훨씬 빠르게 발현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던 '법'과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생존을 향한 처절한 갈구뿐이었습니다.

 


집단 붕괴 속에서 드러난 인간 본성의 양면


영화 속 수용소 장면을 보면서 저는 문득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단체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었는데, 모두가 하나인 척 웃고 떠들었지만 저는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지 못한 채 혼자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대화는 오가고 웃음소리도 들렸지만 그 안에서 저만 어딘가 투명인간 같았습니다. 눈이 보여도 서로의 진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들이 그때 제 모습과 겹쳐 보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집단 심리(Group Psychology)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작동합니다. 집단 심리란 개인이 집단에 속했을 때 혼자일 때와는 다른 판단과 행동을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폭력과 착취가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지만, 다른 쪽에서는 줄리아 무어 같은 '유일하게 눈이 먼 척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 연대와 보호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어떤 집단이 살아남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의 문제라는 게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이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은 이 영화를 "역시 인간은 이기적이야"라는 증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봤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타인을 지키고, 배설물로 가득 찬 바닥을 함께 닦아내며,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키려는 인물들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 존재가 어둠(혹은 너무 밝은 백색) 속에서 오히려 더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의 나쁜 쪽과 좋은 쪽 중 어느 쪽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집단 붕괴를 촉진한 핵심 요인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원 차단: 식량과 의약품 공급이 끊기면서 내부 생존 경쟁이 격화됨

  정보 비대칭: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폐쇄된 환경이 공포와 불신을 극대화함

  외부 통제 부재: 군인들의 공포 섞인 발포와 통제 포기로 수용소 내부 질서 유지가 불가능해짐

  권력 진공: 기존 사회적 지위와 권위가 무너진 자리를 원초적인 폭력 집단이 차지함

 


원작 소설과 영화의 간극, 어떻게 볼 것인가


이 영화를 두고 원작 충실도(Fidelity) 문제를 언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원작 충실도란 원작 소설이나 텍스트의 내용과 메시지를 영상 매체가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해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주제 자체는 충실하게 옮겼으나, 개연성과 인물 심리 묘사에서 원작에 비해 많이 아쉽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도 영화만 먼저 본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장면과 장면 사이의 맥락이 설명 없이 건너뛰는 부분이 여럿 있었습니다. 특히 수용소 내부에서 권력 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이나 인물들의 감정 변화가 너무 빠르게 처리되어 감정적으로 온전히 따라가기가 버거울 때가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부분은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에서 훨씬 세밀하고 지독하게 다루고 있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무가치하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적 한계 안에서 시각적으로 표현한 새하얀 실명의 이미지, 그 텅 빈 공백이 주는 공포는 활자로는 대체하기 어려운 시각적 충격을 줍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으면, 텍스트가 묘사하는 인물 한 명 한 명의 내면을 훨씬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매체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보완 관계를 이루는 드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주제 사라마구(José Saramago)의 원작 소설은 출판 이후 수십 개국에서 번역되며 현대 디스토피아 문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 뒤 소설을 펼친다면, 영화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인간의 심연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눈이 보여도 보지 못했던 것들


이 영화가 끝나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유를 곰씹어 보면, 결국 그건 '실명'이라는 특이한 설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실명 전염병이라는 극단적인 장치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건 결국 우리가 이미 일상에서 반복하고 있는 무관심과 외면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눈빛, 사회의 불편함을 외면하는 습관, 자원이 부족해지면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이기심. 저는 이 영화가 무서운 건 바로 그 점이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단체 여행에서 혼자 창밖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묘한 소외감, 그게 결코 저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는 걸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눈이 멀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들 하지만,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눈이 멀기 전에도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보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우리는 정말로 서로를 보고 있을까요? 아니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눈뜬 채로 실명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주는 불쾌함과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면, 그 불편함의 방향을 한 번쯤 끈질기게 따라가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 끝에는 아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인간다운 시선'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원작 소설까지 함께 읽어보신다면 그 성찰의 깊이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깊어질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_FbnjlSL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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