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끔은 너무 유쾌하거나 눈이 어지러운 최신 그래픽의 영화보다, 가만히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고 긴 여운이 남는 그런 고전 작품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위대한 뿌리이자,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천재성이 날것 그대로 고스란히 담긴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Nausicaä Of The Valley Of The Wind, 1984)>가 바로 그런 작품입니다.
무려 40년도 더 된 아주 오래된 고전 애니메이션이지만, 신기하게도 지금 이 순간 꺼내 보아도 촌스러움은커녕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정교한 세계관과 철학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환경오염과 갈등이 깊어진 현대 사회에 더 절실하게 와닿는 메시지를 품고 있죠. 오늘은 제 마음속에 깊은 파도를 일으켰던 나우시카의 황금빛 세상 이야기를 조금 깊고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줄거리 요약

먼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독특하고도 쓸쓸한 배경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들려드리겠습니다.
영화의 무대는 인간들이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거대한 전쟁을 일으켜 스스로 찬란했던 문명을 황폐화시킨 지 1000년이 지난 미래의 지구입니다. 당시 '불의 7일간'이라 불리는 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지구의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지구의 대부분은 유독가스를 내뿜는 기괴한 거대 버섯 숲인 '부해(腐海)'로 뒤덮이게 됩니다. 인류는 방독면 없이는 단 5분도 버틸 수 없는 유독 가스와, 그 숲을 지키는 거대 곤충들인 '오무(王蟲)'의 위협을 받으며 얼마 남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이 암울하고 황량한 세상 속에서, 신비롭게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의 도움으로 유독가스를 막아내며 자연과 동화되어 평화롭게 살아가는 '바람계곡'이라는 작은 왕국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공주이자, '메베'라는 날렵한 경비행기를 타고 누구보다 자유롭게 하늘의 바람을 읽는 소녀가 바로 주인공 '나우시카'입니다
나우시카는 다른 인간들과는 본질적으로 조금 달라요. 모두가 무서워하고 파괴하려고만 드는 거대 곤충 오무를 원망하거나 배척하기는커녕, 그들의 분노 뒤에 숨겨진 슬픔과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고 진심으로 교감할 수 있는 너무나도 다정하고 단단한 내면을 가진 소녀랍니다.

반전 결말 해석과 웅장한 위로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큰 전율과 소름을 느꼈던 부분은 바로 감독님이 숨겨놓은 '자연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 군사 대국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고 인류의 영원한 생존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유독가스를 내뿜는 부해를 통째로 불태워버리려 합니다. 과거 인류를 멸망시켰던 거대 인간 병기인 '거신병'의 알을 강제로 부활시키면서까지 자연을 정복하고 억누르려고만 하죠. 이러한 인간들의 모습은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눈앞의 이익을 쫓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나우시카가 목숨을 걸고 마주한 진실은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인간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없애고 싶어 했던 유독 가스 숲 '부해'는 사실, 인간들이 수천 년간 더럽혀놓은 지구의 토양과 물을 스스로 정화하기 위해 나무들이 온 힘을 다해 유독 물질을 흡수하고 썩어가며 버티던 눈물겨운 정화의 공간이었던 거예요. 정화를 끝마친 나무의 지하 깊은 곳에는 눈부시게 맑은 물과 깨끗한 모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단 한 번도 인간을 먼저 공격하려던 적이 없었고, 그저 인간이 망친 지구를 살리려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이 아름답고도 슬픈 반전은 스크린 너머의 저에게 아주 묵직한 부끄러움과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습니다.
작품이 던지는 자연과 인간의 메시지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는 수많은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나우시카는 그중에서도 제 마음속 가장 특별한 자리에 위치한 독보적인 캐릭터입니다. 사실 저에게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인생 애니메이션 중 하나이기도 한데요, 신기하게도 몇 번을 돌려봐도 전혀 질리지 않고 볼 때마다 늘 새로운 감동과 깨달음을 선물해 주곤 합니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우시카는 단순히 용감한 영웅이라기보다, '상처받은 자연에게 먼저 다정하게 화해를 건네는 인물'에 가깝다고요.
그녀라고 왜 죽음 앞에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나우시카 역시 피와 살을 가진 나약한 인간이기에 눈앞의 거대한 재앙과 죽음은 당연히 무섭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우시카에게는 그 죽음의 공포보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이 더 이상 인간들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소중한 내 이웃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적국의 군사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을 때,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칼을 휘두르는 인간적인 나약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녀는 이내 복수의 칼날을 내려놓습니다. 증오는 결국 또 다른 파괴를 부를 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죠. 나약함을 온전히 품은 채, 죽음의 공포를 뛰어넘어 자연과 인간 모두를 향해 다정한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이 단단한 숭고함이야말로 우리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우시카라는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인생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 후반부 엔딩 시퀀스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잔인한 계략으로 인해 상처 입은 새끼 오무를 보고, 분노로 눈이 새빨갛게 변한 수천만 마리의 오무 대군이 대지를 뒤흔들며 폭주하는 장면인데요.
마을 사람들과 소중한 생명들을 구하기 위해, 그 거대한 괴물들의 돌진 앞에 아무런 무기 없이 맨몸으로 내려앉은 나우시카의 푸른 옷자락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결국 오무의 거대한 충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쓰러진 나우시카를 향해, 분노를 가라앉힌 오무들이 자신들의 따뜻한 황금빛 촉수를 길게 뻗어 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공중으로 들어 올리며 상처를 치유해 주죠.
그 순간, 애니메이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구원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때 배경으로 잔잔하게 깔리는 거장 히사이시 조의 테마곡과 어린아이의 읊조리는 듯한 싱그러운 멜로디(라라라라 라라라~)가 흘러나오는데,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확 치밀어 오르며 가슴이 터질 듯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더라고요.
지브리 애니메이션 최종 리뷰 및 총평

영화 속 전설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자, 푸른 옷을 입고 황금의 들판에 내려서서, 잃어버린 대지와의 결속을 다져 인류를 푸른 청정의 땅으로 인도할지니."
전쟁과 파괴, 증오로 얼룩진 세상에서 오직 '다정한 사랑과 공존'의 힘 하나로 모두를 구원해 낸 나우시카의 모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바래지 않는 고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이 소속된 잡지사의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단독 제작된 영화였는데, 이 영화의 대성공 덕분에 우리가 잘 아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공식적으로 설립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브리의 위대한 신화가 시작된 첫 페이지인 셈이죠.
지브리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힐링물도 정말 사랑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거장이 세상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에 온전히 나를 맡겨보는 것도 참 좋은 것 같아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방 안을 맴도는 잔잔한 바람의 여운 덕분에 한동안 불을 켜지 못하고 자리를 뜨지 못했답니다.
인류의 오랜 고전이자 지브리의 위대한 서막, 이번 주말에는 바람을 타고 하늘을 가르는 나우시카의 푸른 비행선에 함께 올라타 보시는 건 어떨까요? 오무의 황금빛 들판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찌릿한 전율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댓글로 다정하게 추억을 나누어 주세요! 오늘도 찾아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